정치적으로 당쟁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초기에는 정치적인 이념의 차이에 따른 학파 간의 대립 관계로서 출발하였던 붕당 정치는 점차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 변모하여 갔다. 고산이 정계에 진출한 시기인 광해군의 재위 중에는 북인세력이,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인조반정때 물러나게 된다. 다시 효종때 예송문제로 인해 서인과 남인이 당파 싸움을 한 후 숙종에 이르러 붕당사이의 균형과 견제를 유지하던 붕당정치 형태가 무너진다. 이에 노론과 소론이 경종의 왕위문제와 장희빈 문제로 나누어지게 된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정치 집단간의 세력 균형이 무
세력 확장
-선조 ; 사림정치 통해 동서 분당
왜란 당시 조헌, 김천일, 고경명 등 사림들은 의병을 일으킴
-광해군 ;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림들은 인조반정을 하여 삼강을 바로 세움 -> 북인 퇴출
-인조 ; 대동법을 주장하며 새로이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던 사림들은 병자
서인학파의 학문적 구심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이의 성리학적 이론이 현실적인 실천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계기는 이이의 문인들이 다수 참여하였고, 남인과의 협조 아래 시도된 인조반정으로 서인과 남인이 현실적인 정치세력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면서부터이다. 이이의 경세론에 관한 주장은
노론, 소론, 남인을 골고루 등용 (북인은 광해군때 소멸)
- 삼색도화라 비꼬기도 했음
. 구원제도 : 뒤 책임을 묻지 않고 건의를 받는 제도
. 송인명의 제안 : 탕평책 - 공자의 탕탕평평
. 정조 : 영조정책을 그대로 계승
. 붕당대립의 마무리
13. 탕평책의 실시
. 시파, 벽파
. 1800년 세도정치로 변환
데에는 바로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이다. 첫째, 반정 공신들에 대한 견제 세력을 키우기 위함이요, 둘째, 유교 이념 체제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사림의 지지를 얻어 왕권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며, 셋째, 향촌 사회의 지도적 인사이기도 한 이들을 등용함으로써 백성을 위한 정치를
반정은 문자 그대로 ’올바른 상태로의 복귀‘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반정 이전의 광해군 시대는 ’어지럽고 올바르지 못한 시대‘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조반정이 성공했던 직후, 쿠데타를 주도한 서인이나 그에 동조했던 남인들은 반정이 성공한 것을 가리켜 ‘나라를 다시 세운 경사’라고
있다는 능창군 전(佺)을 교동에 안치한 후 살해했으며 대북정권에 호위된 광해군은 이어 대비폐출계획에까지 말려들어 광해군 10년(1618) 정월에 대비의 존호를 깎아 서궁이라 칭하게 한 대비유폐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3. 서인이 내세운 인조반정의 명목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이 광해군
서인, 북인, 남인으로 분열.
○ 전쟁으로 인해 전국토가 황폐화 백성들은 생활고(生活苦)에 시달림.
○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 전쟁 이전으로의 복구가 시급한 상황.
2. 즉위과정
○ 1575년 선조의 후궁인 공빈(恭嬪) 김 씨의 소생으로 태어남.
○ 친형님인 임해군을 둔 둘째 왕자.
▶ 엄격하게 따